병원은 여전히 그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역한 소독약 냄새 - 주변을 깨끗하게 한다는 약품이 독한 향으로 주변을 오염(?) 시킨다는 건 아이러니다.- 좁은 복도를 지날 때면 닝거병을 밀며 힘겨운 표정을 짓는 십자무늬에 OO의료원이라는 패턴이 뒤덥인 환자복, -그 축늘어진 복장 만큼이나 어깨를 늘어뜨린 병자들을 어렵게 피해가야만 했다.

그는 더운 복도를 피해 밖으로 연결된 통로에 앉아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6월 더위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고 약한 에어컨이 식히기에 병실은 수용인원이 너무 많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한 쪽 손을 힘겹게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누런빛 조명을 등지고 앉은 그, 가슴부터 엉덩이까지 딱딱한 부목을 댄 모습이 부자연 스럽다. 그 부목 사이로 툭 불거진 배가 유독 눈에 띤다. 거동이 불편해서 배에 가스라도 찼나보다 라고 쉽게 유추하고 만다.

살다보면, 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진중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찰나의 선택에 삶의 방향은 바뀌어 있기 마련이고. 그 선택이 주는 결과에 후회도 하며, 혹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서 기뻐하기도 한다.
그는 그런 '찰나의 순간'에 선택한 결과의 피해자 처럼 보인다. 지금 병원에 몇 달째 입원해 있는 이유도 그렇다. 머물고 있던(정확히는' 기거' 라는 표현이 맞겠지만) 고시원에 불이 나면서 2층에 있던 그는 죽음을 생각해야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또다른 그는 다른 선택을 생각했다. 그로써 순간 창을 부수고 뛰어내릴 용기가 생겼고 덕분에 허리가 주저앉고 인대가 파열됐지만 삶은 계속됐다.

"겨우 2층에서 뛰어내리는데 그 지경이 되는게 말이되냐??"

둔한 녀석을 질타하며 위로아닌 위로를 건낸다. 녀석에게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약하디 약한 녀석에게서...


녀석을 처음 알게 된것은 정확히 1990년 3월 3일 이었다. 벌써 15년 전이다. 몹시 야위어 있던 녀석은 언제나 주변에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런 녀석이 우습게도 나름의 고집을 가지고 있어서 '찰나의 순간' 누구보다 당당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곤 했다. 유망한 인재였음에도 대학을 포기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더니, 스무살 초반에 거의 충동적으로 결혼을 하고, 임신할 수 없다는 '영구 불임' 판정을 받은 후에 짧은 결혼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또 수 많은 순탄치 않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녀석을 고시원으로 내 몰 았던 선택은 친구의 사업에 투자하며 보증을 선 탓이다. 친구의 사업이 사기를 당하면서 10여년을 모았던 재산을 깡그리 털린 것은 물론이고, 제 2 금융권을 지나서 사채업자 선까지 그 책임이 떠 넘겨지고 있었다. 가족들, 친구들에게 겨우 돈을 마련해서 어렵게 몸을 빼낼 수 있었지만, 그런 그에게 남은거라곤 가족들의 외면과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 뿐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냐?"

누런 조명을 맴도는 날벌레들을 바라보며 무심히 던진 질문에 그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나 애 생겼어!"

명치 끝에 턱 걸린 수 많은 말은 목을 타고 올라오지 못한 채 답답하게 가슴을 움켜쥐고 괴롭힌다.

"믿기지 않지? 나팔관이 자연 치유됐데...."

내 오래 전 습관아닌 습관이 떠오른다. 너무 답답한 순간을 만나면 아무런 말도 하기 싫어져서 그냥 입을 꼭 닫아버리는... 잊고 있었는데 나에겐 그런 버릇이 있었던 거다. 그걸 그녀가 다시 떠올려 준다.

한동안 말없이 빈 하늘을 바라본다.

여자에게 애를 갖을 수 없다는 선고는 '사형선고' 와 같다던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의 차이. 그 선택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 나 둔하잖아, 몰랐어. 입덧도 없었고...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알았지 뭐야.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 연애를 했던 건 더욱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 친구는 결혼해서 연애 하자는데.. 모르겠어. 나 또 싫어지면 그만 둬 버리잖아. 그 힘들었던 결혼 생활을 또 할 자신도 없고...
불이 났을 때 딱 죽겠구나 싶은데... 이 애는 나하고도, 세상하고도 참 인연이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 애가 불쌍해서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애를 생각해서라도...잘했다고 생각해. 애 때문에 약물을 쓸 수 없어서 치료도 힘겹게 받지만, 애가 뱃속에서 노는 걸 느낄때면 정말 좋아. 잘했다고 생각해.
애 배냇이름이 '사랑' 이야. 사랑없이 생겨났지만, 그 어떤 애보다도 사랑해 주려구..."

다부진 표정은 어려운 선택을 넘어선 후의 행복감이 역력하다.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 오랜 소원 성취 했네... 너 애 갖는게 꿈이었잖아 "

오랜만에 밝은 그녀의 웃음을 본다.


또 다른 힘든 '찰나의 선택'의 순간이 다가 오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그렇게 또 힘겹게 이겨 나가다 보면 신의 선물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그것이 삶의 묘미. 살아가는 맛 아니겠나.



아직 어린, 짧은 서른 중반에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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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dogy 2005/06/25 16:16 수정/삭제/ 댓글

    헛.. 엄마가 아니셨구만요.
    이분이.. 그 10년의 여인이군요.

    왠지.. 상당히 답답합니다.
    누구도 그 옆에서 말해줄 순 없겠지만.

  2. zapzap 2005/06/26 02:03 수정/삭제/ 댓글

    건강한 아기 나으시길 바랍니다. 빠이딩.

  3. BlogIcon akgun 2005/06/26 23:56 수정/삭제/ 댓글

    dogy// 선택의 댓가는 치르기 마련이지. 그것이 행복한 결과가 되기만을 바랄 뿐.

    zapzap// 너무 건강해서 병원사람들이 다 놀란다네. 그지경(?)이 되어서도 전혀 투정이 없으니... 엄마 고생 안 시키려고 벌써부터 철이 든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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