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annam-
묘한 책이다. 을지로 인쇄골목의 허름한 인쇄소에서 저가로 찍어낸 듯한 외형에, 시집(똑같은 판형으로 제목만 다르게 찍힌 채 서점 한켠을 장악하고 있는) 두께의 책은 어쩐지 그 표지 그림 만큼이나 익숙하면서도 웬지 손이 가지 않는다. 세련되지 못했달까.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지만, 읽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다. 문체가 무척 낯설어서 그동안의 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뚝뚝 끊기는 묘사와 넓직한 행간이 베트남을 가로지르는 메콩강 만큼이나 넓고 깊다. 그리고 풍부하다. 메콩강에 가봤냐고 따지지 말자. 그 여백이 주는 깊이를 읽어 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묘한 매력' 정도로만 받아 들이기로 하고 책을 덮는다. 다시 읽기 쉬울 만큼 분량도 적으니까. 책을 읽어도 뒷부분에 붙어있는 옮긴이의 해설글 같은 것은 안읽는 편인데 이 책의 시대배경이 궁금해서 몇 페이지 읽어보다가 역시 그만 뒀다. 자세한 정보를 알아야만 글 읽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 근데 난 왜 이 책의 저자가 여자일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걸까.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중 한 편이 쥐스킨트의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인 탓에 그의 소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콘트라 베이스>는 단 한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았고 <깊이에의 강요>는 '단편이니 짧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쉬웠었다. 그래서 이참에 향수를 향수하며 쥐스킨트의 책을 내리 세권 읽어 주신다. <비둘기>는 좀머씨 이야기를 닮았다. 어쩌면 은둔하며 지낸다는 작가 자신의 삶과 닮았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에세이집을 읽어보면 그의 은둔은 단순히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행위라는 느낌이지만 .- 일상을 욕심없이 살아가는 어느 중년 사내가 어느날 자신의 비밀스런 공간 앞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삶이 통채로 흔들린다는 이야기.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까마귀가 길조고 비둘기가 흉조라던.... 아! 쓰다보니 비둘기가 아니고 까치가 흉조 였던가 -.,-;; 아무튼!
* 유럽영화에도 그렇고 묘하게 답답하단 말이지.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의 추구와 발견>
헬무트 디틀과 공동 작업한 영화 시나리오. 오르페우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신화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재결합의 실패'는 흔한 이야기이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지만 과거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추억은 추억인 채로 존재하며 삶은 미래로 걸어가는 행위인 거다. 사랑도 그 삶의 일부임이 분명할테고.
* 삶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감동이 없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을 생각하다>
쥐스킨트는 그의 책보다는 다소 평범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게한 책. 특히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에게 천박한 행위로, 얼치기들의 짧은 탐닉으로 여기는 시선에 조금 의외. 대신 예수의 계산된 행위 - 사랑과 감동을 얻기 위한 희생- 보다는 어리석은 결과를 동반할 수 있는 속인들의 사랑에 더 가치를 두는 시선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 한 작가의 저서 중 대부분의 경우 처음 접한 책이 가장 만족 스러웠던 것을 보면 내가 어지간히 대표작 만을 읽고 있나 보다.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하루 중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띄엄띄엄 읽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책 읽는 방법이 어느 때보다도 아쉬웠던 책. 언제 날 잡아서 한 번에 다 읽고 싶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의 3부로 구성된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지 파악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3부인 '잠겨 있는 방'을 읽을 때 쯤 1부 '유령들'에 나왔던 '퀸'의 족적이 가물해져 있어서 난감했다. 머리가 나쁜 탓이다. -.,-;; 폴 오스터의 책은 이것이 <거대한 괴물>에 이어 두 번째 임에도 그의 문장에 이미 빠져들어 버렸다. 읽다가 잠든 밤이면 그 특유의 문장 흐름이 꿈의 해설로 등장하기 일쑤다. 딱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장황하게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주절거리고 있지 않다라는 느낌. 읽어야 할 그의 책이 아직도 여러권 남았으며 사둔 책이 두권이나 남았다는게 행복하다.
* 설마 그의 소설에 전부 작가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묘한 책이다. 을지로 인쇄골목의 허름한 인쇄소에서 저가로 찍어낸 듯한 외형에, 시집(똑같은 판형으로 제목만 다르게 찍힌 채 서점 한켠을 장악하고 있는) 두께의 책은 어쩐지 그 표지 그림 만큼이나 익숙하면서도 웬지 손이 가지 않는다. 세련되지 못했달까.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지만, 읽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다. 문체가 무척 낯설어서 그동안의 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뚝뚝 끊기는 묘사와 넓직한 행간이 베트남을 가로지르는 메콩강 만큼이나 넓고 깊다. 그리고 풍부하다. 메콩강에 가봤냐고 따지지 말자. 그 여백이 주는 깊이를 읽어 낼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묘한 매력' 정도로만 받아 들이기로 하고 책을 덮는다. 다시 읽기 쉬울 만큼 분량도 적으니까. 책을 읽어도 뒷부분에 붙어있는 옮긴이의 해설글 같은 것은 안읽는 편인데 이 책의 시대배경이 궁금해서 몇 페이지 읽어보다가 역시 그만 뒀다. 자세한 정보를 알아야만 글 읽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 근데 난 왜 이 책의 저자가 여자일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걸까.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중 한 편이 쥐스킨트의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인 탓에 그의 소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콘트라 베이스>는 단 한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았고 <깊이에의 강요>는 '단편이니 짧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쉬웠었다. 그래서 이참에 향수를 향수하며 쥐스킨트의 책을 내리 세권 읽어 주신다. <비둘기>는 좀머씨 이야기를 닮았다. 어쩌면 은둔하며 지낸다는 작가 자신의 삶과 닮았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에세이집을 읽어보면 그의 은둔은 단순히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행위라는 느낌이지만 .- 일상을 욕심없이 살아가는 어느 중년 사내가 어느날 자신의 비밀스런 공간 앞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삶이 통채로 흔들린다는 이야기.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까마귀가 길조고 비둘기가 흉조라던.... 아! 쓰다보니 비둘기가 아니고 까치가 흉조 였던가 -.,-;; 아무튼!
* 유럽영화에도 그렇고 묘하게 답답하단 말이지.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의 추구와 발견>
헬무트 디틀과 공동 작업한 영화 시나리오. 오르페우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신화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재결합의 실패'는 흔한 이야기이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지만 과거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추억은 추억인 채로 존재하며 삶은 미래로 걸어가는 행위인 거다. 사랑도 그 삶의 일부임이 분명할테고.
* 삶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감동이 없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을 생각하다>
쥐스킨트는 그의 책보다는 다소 평범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게한 책. 특히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에게 천박한 행위로, 얼치기들의 짧은 탐닉으로 여기는 시선에 조금 의외. 대신 예수의 계산된 행위 - 사랑과 감동을 얻기 위한 희생- 보다는 어리석은 결과를 동반할 수 있는 속인들의 사랑에 더 가치를 두는 시선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 한 작가의 저서 중 대부분의 경우 처음 접한 책이 가장 만족 스러웠던 것을 보면 내가 어지간히 대표작 만을 읽고 있나 보다.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하루 중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띄엄띄엄 읽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책 읽는 방법이 어느 때보다도 아쉬웠던 책. 언제 날 잡아서 한 번에 다 읽고 싶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의 3부로 구성된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지 파악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3부인 '잠겨 있는 방'을 읽을 때 쯤 1부 '유령들'에 나왔던 '퀸'의 족적이 가물해져 있어서 난감했다. 머리가 나쁜 탓이다. -.,-;; 폴 오스터의 책은 이것이 <거대한 괴물>에 이어 두 번째 임에도 그의 문장에 이미 빠져들어 버렸다. 읽다가 잠든 밤이면 그 특유의 문장 흐름이 꿈의 해설로 등장하기 일쑤다. 딱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장황하게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주절거리고 있지 않다라는 느낌. 읽어야 할 그의 책이 아직도 여러권 남았으며 사둔 책이 두권이나 남았다는게 행복하다.
* 설마 그의 소설에 전부 작가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