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는 자정을 지나 새벽 세시가 되어서도 식을 줄을 몰랐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놓기라도 한 듯 축축한 온기를 내품고 있었고 발을 어느 곳에 옮겨 놓아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내는 넓은 퀸사이즈 침대에 아무렇게나 자신의 몸뚱이를 던져 두었다가 만사가 귀찮다는 듯 느릿느릿 다시 몸을 추스리고는 머리맡의 스텐드를 켠다. 그 불빛에 붉은색 하드 커버를 한 <풀 오스터>의 책이 유난히 선명하다. 그 붉은색이야말로 그때까지의 무기력했던 그의 의식을 일순간 정화시키는 강렬함이었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로 이미 온전한 판단력은 힘을 잃었지만 그럴 수록 마음은 더욱 무엇이든 읽고 싶다라는 충동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 '읽고싶다'라는 욕구야말로 알코올에 점령된 정신이 만들어 낸 그릇된 판단의 대표적 증상인지도 모른다. 그도그럴것이 그는 스스로 '읽고 있다'라고 믿는 행위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읽던 문장의 흐름을 놓쳐버리고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책 속의 단어가 의미를 알 수 없도록 허공에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눈이 감기고 아랫배 위에 놓여있던 책은 제 무게만큼의 속력을 내며 침대 한켠으로 떨어졌다. 깊은 잠은 아니었다. 설령 깊은 잠에 빠졌었던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의식을 수면 가까이 부상시켜 잠인지 꿈인지 모를 공간으로 옮겨 놓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출현때문이었다.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들어 온 그 보다도 더 늦게 들어온 그녀는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조용히 남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남자는 그가 걸친 조그마한 팬티 싸이즈 만큼이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듯 나약해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런 남자를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더니 보일듯 말듯 몇 번인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천천히 방 안을 맴돈다. 조용한 그녀의 움직임 - 마치 방 안에 가득한 공기의 일부라도 된 듯 스스로의 행위에서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 내지 않는 움직임- 은 둘 사이의 관계가 낳은, 오랜 시간이 축척되어 쌓인 결과물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원치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인내심이 더이상 그녀를 받아 들일 수 없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런 남자와는 달리 그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를 원했다. 세상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쪽이 약자가 되지 않던가. 그로써 그녀는 약자였고, 언제나 남자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아야 했으며, 실제로 그녀는 그에 걸맞는 행동을 주의깊게 실천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둘 이면서 하나 만 존재하는 듯한 세계, 자신의 삶을 온통 상대를 위해 맞추는 - 그러면서도 생을 지속해야만 하는 - 삶이란 얼마나 처연한 것인지, 그녀가 아닌 다음에야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가늠해 내기란 쉽지않다. 그러나 이 불평등해 보이는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 어디까지나 100% 그녀의 노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 불평등한 관계의 일방적 희생자라고 말하는 것은 잘 못 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는 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런 희생만큼의 댓가를 그에게서 충분히 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득'의 가치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꼭 그가 필요한 것인지 조차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남자를 원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로선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고 자신에게 그 이상의 시간이 주어질 것인지 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위의 남자에게 조금 다가가 본다. 예민한 남자는 잠결임에도 금방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 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런 남자의 움직임이 불안해서 급히 물러선다. 한동안 그런 조심스런 행위가 반복되고 나서야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자의 발치로 다가갈 수 있었다. 덥고 습한 날씨와 과하게 마신 알콜탓에 남자의 몸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 냄새가 지나치게 강하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그것을 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익숙했고 그것에 행복감을 느끼기 까지 했다. 발치에 앉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발에 입을 가져다 댄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 그리고 깊게 남자의 향기를 빨아들이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안겨주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으며 그것을 만회할 기회는 더이상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깨어있었고 그녀가 어쩌지도 못할 짧은 순간에 이미 그녀는 남자의 손바닥 안에 놓여 있었다. 작은 그녀는 형체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입 - 불과 몇 초전 멀쩡한 형상이었던 그녀의 입 - 이 닿았던 발등을 다른 한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그녀의 찢긴 몸을 흡족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리곤 휴지 한 쪽을 뜯어내어 손바닥에 이겨진 그녀를 꼼꼼하게 닦아낸 후에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잠이든다. 더이상 남자를 자극하며 윙윙거리고 날아다닐 존재는 방안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