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지하철에 오른다. 스물댓 정도로 보이는 남자 옆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고 선다. 그리고 에코의 '글쓰기의 유혹'을 펼쳐 읽던 부분을 찾으려는데 남자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그런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무슨 이런 개념없는 여자애가 있나' 싶어 노려보고 있었다. '실례잖아~!!' 옆에 서있던 남자가 여자애에게 무슨 일이냐고 나즈막히 묻는다. 일행이었던가보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 남자에게 제 웃음의 근원을 얘기해주려 하던 여자가 내 눈치를 힐끗 보더니 "아니, 나중에..." 라면서 다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한참을 그렇게 내 눈치를 보며 키득거리더니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핸드폰이다. 그리곤 문자를 적기 시작한다. 폴더를 닫는 순간 옆의 남자애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문자를 확인한다. 남자애는 별 반응이 없다. "네가 입장을 바꾸고.... 네가 나라고 생각해봐. 니가 얘기해주라" 소곤 소곤 - 다 들린다 - 출근길의 횡재라도 만난 듯 재잘 거린다. '내 바지 지퍼가 열린거군' 이라는걸 이쯤해서 모를리가 없다. 읽던 책은 아무리 들여다 봐도 눈에 안 들어온다. 지금 입고있는 복장 상태로 쪽팔릴 일은 없다. 웃옷이 가랑이 밑까지 내려온 상태여서 설사 자크가 열렸다 해도 전혀 보일리가 없는데 자리를 잡기위해 손잡이에 손을 들어올릴 때 슬쩍 보였었나 보다. '웃옷을 들어올려 지퍼를 확인해야 하는 걸까? 그럼 내가 눈치 챈것을 알고 여자애는 더 신나서 웃겠지? 그냥 모른 척 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정말 내 지퍼가 열렸다는 확신도 없잖아...' 오만가지 가능성이 머리속을 휘젖는다. 이쯤 되니 쪽팔림보다 화가 치민다. 가뜩이나 불면의 밤으로 예민해진 상태. 앉은 여자애의 옆자리가 비고 그 자리에 내 옆에 섰던 남자애가 앉는다. 그리곤 또다시 여자애의 귓속말이 시작된다. 이쯤 되니 화도 누그러 들고 냉정해진다. '얘기 해라. "저기요. 자크 열렸어요" 라고 한 마디만 하렴.'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읽던(읽는 척 하던) 책을 접고 차분히 지퍼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한 템포 쉰다음 천천히 허리를 숙여 여자와 남자 사이에 머리를 가져다 댄다. 그리곤 다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자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나즈막히 얘기해 준다.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 투로. " 웃냐? 웃어? 재밌냐? 재밌어 죽겠지?? 남의 곤란을 즐기는게 좋아??" 고개를 천천히 반대로 돌려 남자애를 한 번 봐주고 "재밌는 커플이네..."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려 놀란 여자애와 눈 한 번 마주쳐주고, 느리게 허리를 편 다음 읽던 책을 펼치고 느긋히 독서를 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읽고있던 '글쓰기의 유혹'에 그런 지침 따윈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실천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커플은 내게 더이상 관심도 없다는 듯이 덤덤히 자신들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에 도착하고 내가 먼저 뒤 돌아 서서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이' 내렸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