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 때였던가.

실습시간 이었는데 아마도 '실과'수업이었던 것같다. 계란 후라이를 하는 것이 그날의 수업 목표였는데, 대여섯 명 정도가 한 조를 이뤄 이쁘고 맛있는 후라이를 만든 후에 평가를 받는 형식이었다. 매일 딱딱한 수업만 계속되다가 모처럼 특이한 수업을 받으려니 아이들은 소풍가는 날 만큼이나 들뜨고 한편으론 진지했다.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빙 둘러 서서 후라이팬을 내려다 보고있던 모습들을 상상해 보면 지금도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 나온다. - 한 손에 프라이용 주걱을 꼬옥 쥐고...

후라이팬에 두른 식용유가 달궈지고 그위에 조심스럽게 계란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아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지만 여자아이 하나가 달려드는 주걱을 '소림사 주방권 십팔기'라도 전수 받은 듯 가볍게 걷어내며 거만한 표정 - 뒤의 진지함 - 으로 계란의 모양을 동그랗게 잡아 나간다. 한껏 그녀의 요리솜씨가 발휘되는 순간, 주위에 둘러선 아이들의 입에서 적절한 추임새 마냥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오오~ 그 아리따운 모습이란...

소녀는 주걱을 왼손으로 가볍게 옮겨쥐고는 가는소금을 손가락 끝으로 조금 집어서 계란후라이 위에 솜솜히 뿌리기 시작한다. 모두는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흰자위가 또렿한 하얀색을 띠며 익어가는 탓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동그란 모양이 더욱 완벽해 보였고, 능숙한 자세로 -조금은 새침하게 - 소금을 뿌리는 소녀의 자태로 보아서는 맛도 일품일 것이다. 다른 조의 우왕좌왕하는 소란을 흡족하게 둘라보며 우리조가 1등은 따놓은 단상이라고 여겼었다.

막 소녀의 소금뿌리던 손이 거둬질 쯤에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무언가 제 몫을 해야 돼!'

라는 깨달음 - 그것은 악마의 음성 - 이 느껴지는 순간, 내 주걱은 빠르게 계란후라이 밑을 파고들고 있었다. 반쯤 파고든 주걱을 확인하고 손목에 가볍게 스냅을 걸어주자 후라이는 추석날 새색시가 빚은 송편 마냥 보기 좋게 반으로 접혔다. 그 반원안에서 터질 듯 터지지 않고 볼록하게 배 부른 노른자의 모습, 그 모습이 어찌나 만족스럽던지...

'완. 벽. 해!!'

라는 만족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원들의 입에서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탄성이 아닌 괴성.

"지금 뭐하는 거야?!!"

소녀의 굳은 얼굴은 봉숭아 꽃망울 마냥 터질듯이 붉었다. 다른 조원들의 표정 역시 금방이라도 손에 든 주걱을 내 면상에 던질 듯한 태세였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게 마음에 안 들어? 1500원짜리 고급 각도계 마냥 정확한 반원에다가 그 안에 볼록하게 숨은 사랑스런 노른자. 이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너무나 완벽해서 질투를 사는 것인가.'

어느새 조 밖으로 밀려난 나는 후라이팬 주걱만 움켜쥔 채 멀뚱히 서서 고민할 뿐이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 것인지. 그 시절 실습용으로 집에서 어렵게 가져온 계란의 갯수가 충분하지 않았으니 - 보릿고개 막 넘기던 시절(콜록;;) - 우리조는 그 모양으로 심사를 받았고 그 결과, 소녀는 쭈그려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다른 집의 계란후라이는 우리집과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어머니, 우리집 후라이는 왜 반원인거야?"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논뚝길 아래로 가라앉을 듯 무거웠고, 손에는 후라이팬 주걱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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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apzap 2006/02/06 13:16 수정/삭제/ 댓글

    우리집도 반원인디??

  2. 일쭌 2006/02/06 13:21 수정/삭제/ 댓글

    그래서 자기 눈크기가 남들에 비해 반쪽인거야?

  3. BlogIcon akgun 2006/02/06 13:24 수정/삭제/ 댓글

    zapzap// 그래서 우리가 친구 아니겠냐. 근데, 별로 위로가 안 되는디??

    일쭌// 내 초승달같은 눈웃음에 반한거야? 응??

  4. BlogIcon 대마왕 2006/02/06 13:45 수정/삭제/ 댓글

    실과 시간 아이들이 기름으로 후라이팬을 달구면 거기에
    물을 뿌리고 놀았더랬죠..
    기름과 달걀이 사방으로 튀면서 흩어지는 아이들.
    무척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5. 일쭌 2006/02/06 14:31 수정/삭제/ 댓글

    죄송합니다..초승달 같은 눈에 반해서 배가 반달모양이 되었습니다

  6. BlogIcon akgun 2006/02/06 16:15 수정/삭제/ 댓글

    대마왕// 너도 '실과' 수업이 있었단 말이냐?
    바느질 하는 네 어린 모습이 떠올라 흐믓하구나.
    나쁜 습관이 남은 걸로 봐서는 '물 뿌리고 노는'것만 배우고 차분히 앉아서 바느질하는 교양은 안 쌓은 듯하지만...

    일쭌// 노른자 좀 그만 드세요.

  7. BlogIcon 연이랑 2006/02/06 21:50 수정/삭제/ 댓글

    계란 껍질깰때 이미 노른자는 터저서...반달 모양까지도 못갑니다.커커...

  8. JSA 2006/02/06 23:17 수정/삭제/ 댓글

    둘러맨 책보따리의 무게가 천근인양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주걱 쥔 손을 옆으로 뻗어
    남의 집 담벼락을 부우우우~~욱 긁으며 가는
    왕따 소년의 비주얼이... 가심을 긁는군요.

    떠오른 수수께끼 하나.
    한쪽 <벽>이
    다른 한쪽 <벽>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9. BlogIcon akgun 2006/02/07 12:24 수정/삭제/ 댓글

    연이랑// 한 손만으로도 능숙한 제 솜씨를 보여... . 생각 해보니 전 노는자를 안 좋아하는군요. -.,-

    JSA// 저를 너무 고시대적인 인물로 보시는 것 아닙니까.
    '책 보따리'를 '둘러 메고' 다니던 모습이 저도 상상되어서 난감합니다.

    근데 벽 얘기는 갑자기 왜? -.,-;; 너무 어려운 수수깡이잖아요!

  10. JSA 2006/02/07 18:47 수정/삭제/ 댓글

    이따가 모퉁이에서 만나자~ ^^

  11. 2006/02/07 23:22 수정/삭제/ 댓글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2. BlogIcon oopsmax 2006/02/08 05:04 수정/삭제/ 댓글

    여긴 또 (사진처럼) 눈이 가득 쌓였지요~
    소년 악군은 최선을 다한 거잖아요.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오.
    (짝짝 토닥 쓱쓱 싹싹 ... 찰싹,, 그러게 수업 시간에 딴생각 좀 하지 말란... 퍽퍽;)
    반원 기피증이라도 생기셨을까. 후일담이 궁금.

  13. BlogIcon akgun 2006/02/08 11:08 수정/삭제/ 댓글

    JSA// 모퉁이에서는 힘들 듯 한데요. 무너진 담벼락 끝쯤이 좋을 듯.

    비밀 댓글// 끄덕.. 끄덕.. 끄덕...

    oopsmax// 어째서 그놈의 눈이란 녀석은 저 없을 때만 온답니까.
    최선을 다했다고 보긴 힘들구요... 최악을 당했다고 보는게 맞지요.
    (요즘 어쩐지 잔뜩 불만에 차신 것같은데, 일이 많아서 그런건가...)
    기피증이라니요. 전 동그란 건 다 사랑해요 -.,-;

  14. BlogIcon oopsmax 2006/02/08 11:45 수정/삭제/ 댓글

    불만이라니요? 전혀 네버 에버 (왜 그런 생각을?) 요즘 정신이 좀 없긴 해요. 블로그에도 신경을 잘 못쓰고 있고.
    계란 후라이는 여전히 반원으로?
    행복한 하루 되세요, 착하고 예쁜 악군님. ○●◎⊙◐◑ (기분 좋으시라고 사랑하실 만한 것들 모아봤습니다. ^ ^)

  15. BlogIcon akgun 2006/02/08 12:28 수정/삭제/ 댓글

    요즘은 그냥 동그랗게 만들지요. 문제는 훼까닥 뒤집어서 익힌다는 차이랄까요. 일종의 반발심리.
    제 친구들이 감히 댓글을 남길 수 없는 포스가 풍김니다. 제가 좀, 아니 많이 착하고 예쁜데 제 친구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지요. ◑.,◐;;

  16. BlogIcon 미루키 2006/02/10 13:25 수정/삭제/ 댓글

    푸하;; 한편의 수필이네요 ^^ 재밌어요..

  17. BlogIcon akgun 2006/02/10 13:39 수정/삭제/ 댓글

    아. 제 슬픈과거가 미루키님께는 우끼게 들리다니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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