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둘러싼 야산의 중턱에 놓여있었다. 앞쪽으론 이제막 개발이 시작되는 서울 변두리도시의 분위기를 상징하듯 큼지막한 아파트 단지가 시선을 가로막으며 올라서고 있었고 그 한쪽켠으로 겨우 숨이트일만큼 열린 원경이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들 무리는 학교 뒷산의 중턱을 가로지르는 샛길을 따라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아니, 정확히는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닌 '학교가 끝나는 것'이다. 학교는 그저 하루의 시간 중 그들이 치러야 할 어쩔 수 없는 의무에 지나지 않았고 마음을 다해 원하는 시간은 언제나 방과 후였으므로 산을 넘는 행위는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닌 지겨운 시간에서 벗어난 '본격적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야산의 고개를 돌아서면서 무성한 나무 사이로 채 학교 건물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담배를 꺼내 문다. 하룻동안 언제있을지 모를 검문과 감시로부터 나름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꽁꽁 숨겨두었던 전리품이었다. 무리는 금방 증기기관차같은 연기를 머리위로 뿜으며 걷고있었다. 그리곤 그날의 영웅담이 펼쳐진다. 하룻동안 어떻게 그 답답한 장소에서 버텨왔는지에 대한 욕설섞인 - 욕설 만큼이나 과장이 섞인 이야기들 이었다. 산을 경계로 학교와는 완전히 등을 맞대고 서있는 곳에 그들의 단골 당구장이 있었다. 1993년 5월 13일의 위헌 판결이 있기 전까지 당구장은 '청소년 출입금지'장소 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금지>는 더욱 당구장을 찾도록 하는 매력쯤으로나 여겨졌을 뿐이다. 이제막 큐걸이에 익숙해진 나는 구석에 놓인 쇼파 - 이승만 시대부터 그자리에 붙박혀있었을 듯한, 색바래고 부분부분이 찢겨 청색테잎이 붙어있으며 엉덩이 부분이 심하게 파인 - 에 앉아서 해가 지고 화실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나 피워물고 있었다. [씨티 헌터]를 넘겨 보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패싸움에 '쪽수 맞추기' 정도나 하면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무리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때의 녀석들도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온 어리버리한 나를 살갑게 대해주는 녀석들이라곤 그놈들 뿐이었다. 덕분인지 졸업식에서 되짚어 볼 수있는 이름이라곤 채 열다섯이 넘지를 않았지만 그리 후회스런 생활은 아니었다. 그 중 한 녀석이 싸이판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라는 얘기를 그 무리들의 마지막 소식으로 들었었다. 다들 지금은 애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우려와는 다르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고들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 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