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할아버지께선 서당 훈장님이셨다. 50여가구 뿐인 - 지금은 그 조차도 반으로 줄었다 - 조그만 촌 마을의 훈장님 이셨지만, 방학 때가 되면 도시의 애들까지 내려와서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 시절의 도회적인 여자아이들이란 어찌나 말꼼하고 새쵸롬하고 달콤 쌉싸름 -_-;; 아무튼, 방학 때면 도시미가 풍기는 아이들과의 교류가 있어서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경계와 적대감으로 출발했지만.. 훈장님이셨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김家 촌락의 웃어르신다운 풍모 그 자체다. 언제나 말끔한 한복에 오래된 부채를 지니고 다니셨고, 담배는 항상 긴 곰방대에, 여유있는 걸음걸이와 한시를 흥얼거리시는 모습이 옛 선비의 모습 같달까. 덕분에 외할머니께선 전형적인 조선여인네의 순종적인 모습으로 사셨지만...-_-;; 하여간 이 양반들이란 뒷짐만 지고 다닐 뿐, 도대체 아녀자의 머리에 물건 이고 있는 것도 안 받아 준다니깐. 또 하여튼, 소문으로 듣기에 일제 시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일본인 이었던 선생의 '싸다귀'를 때린 적이 있다는 다소 과장된 이야기가 있었다 - 우리 엄니나 외삼촌들이 퍼트린게 분명하다. - 확인 할 길은 없지만 그에 어울리는 에피소드가 있어서 놀라웠던 적이 있다. 때는. 한창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폭우와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그에 질세라 열심히 "공자 왈, 맹자 왈" 을 읊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사실 나는 겨우 "하늘 천, 따 지~" 수준이었지만 - 외할아버지의 마룻턱에 뒷짐지고 서계신 그 모습이 번갯불에 진한 그림자를 만들어 더욱 위엄있게 보였다. 난 어떡하면 장마로 불어난 개울가에 가서 미꾸라지나 잡으며 놀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그 모습을 올려다 보고있었다. 서당이 옛 집이었던 탓에 대청마루의 두겹짜리 문을 포갠다음 위로 들어 올려서 문의 밑 부분을 처마끝에 걸어두는 식이었는데, 이게 바람에 흔들리더니, 곧장 떨어져서 외할아버지의 발등을 찍었다. 두겹짜리 무게와 날카로운 나무 모서리가 그대로 발등에 떨어진거다. 보고만 있어도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지르던 꼬맹이들과 다르게 외할아버지는 꼼짝도 안하셨다. 마치 오랜 세월탓에 발의 감각이 사라진 것처럼 가만히 당신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 보고 계실 뿐. 난 멍~ 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있었다. 그 강렬한- "억!" 소리는 고사하고 표정하나 변치 않던 -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닭죽'을 끓여오신 외할머니께서 퉁퉁부어 수박만해진 발등을 치료해 주셨지만... 가끔 내 스스로 가부장적, 그리고 남성 중심적인 마인드를 보일 때가 있다. 배워먹은 모양새가 그러니 그게 어디 가겠냐 싶어 씁쓸할 때도 있고, 그 시대가 그러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눈치를 보기도 한다. 시대는 변했고 나도 그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