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꾸게 되는 꿈이 있다.
그 꿈은 배경 설정이 언제나 동일한데, 장소와 시간, 등장 인물과 사건 전개가 매번 같을 뿐 아니라 심지어 결말까지도 항상 똑같다. 이미 본 영화를 또 보고 있달까. 아니다, 그 순간의 나는 영화의 끝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메맨토에 가깝다. 슬픈 기억만이 남아있는, 그래서 울다 지쳐 잠들고 깨어나면 울었던 기억이 없는 탓에 또 울다가 지쳐 잠들고 깨어나 울기를 반복한다는... 그것도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이미 정해진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으니 '사랑의 블랙홀'의 빌 머레이가 부러울 지경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반복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빌 머레이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꿈의 시간적 배경은 그저 오후의 열기가 한숨 꺾인 시간이며 공간적인 배경은 오래된 물건들로 가득 둘러싸인 - 인사동 한 귀퉁이에나 있을 법한 인테리어를 하고있는 - 실내이다. 'ㄴ'자 모양의 방엔 기댈 벽이 없을 만큼 오래된 물건들이 주변을 가득 둘러 싸고 있고 구하기 어려웠을 법한 그것들의 생김과 적절하게 배치된 모양이 주인의 품격을 말해 주는 듯하다. 'ㄴ'자 모양을 제외한 나머지 'ㅁ'자 모양의 공간은 넓은 유리창을 경계로 나뉘어 있는데 표구사 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술관련 물품을 취급하는 곳 처럼 보이기도 한다. 꿈에서의 나는 항상 방안에 앉아만 있기에 그곳이 딱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니, 애초부터의 나는 그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방안에 같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모의 여성들에게만 쏠려있을 뿐이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세명의 여성은 모두 제각각의 개성있는 헤어스타일과 화장법, 악세사리와 의상으로 한껏 매력을 뽐내고 있다. 그 중 한 여성이 붉은 입술을 움직여 자신의 음성을 실내에 퍼뜨리면 그것을 손사래쳐 흐트러 뜨리듯 또 한 여성의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가 이전의 소리들이 흐트러진 자리를 차지하며 끝없이 방안을 떠다녔다. 그녀들의 대화는 그 떠도는 양과 부피에 비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턱없이 적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감탄사 섞인 대화를 늘어 놓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이 방에 처음 방문한 것이며 장식품들에 한껏 고무된 상태라는 것만을 짐작 할 뿐,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세 명의 여인은 모두가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토하는 일본인들이다. 난 그들과 나누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듯하다. 가끔 창밖을 힐끔거리며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낯선 손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살피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 여성들에게 흑심을 품고있는 것이 분명하며 상대의 의중도 나와 같다는 얼토당토않는 확신조차 가진 것으로 보인다.
유리 저편의 사내를 살피던 시선을 방안으로 돌리자 어느새 두 여인은 온데 간데 없고 한 여성과 나, 둘 뿐이다. 알듯 모를듯한 시선이 오가고 둘은 'ㄴ'자 모양의 구석진 방 한 켠으로 엉키듯 스러진다. 내 시선은 연신 유리 저편 사내의 동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지긋이 눈을 감은 여인의 표정을 주시한다. 그녀의 표정과 감정에 동화되려는 순간, 출발하는 기차의 숨을 토하는 듯한 주인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안은 한순간 나풀거리는 나비가 사라진, 노소설가의 낡은 책장처럼 적막하다. 지긋이 눈감은 그녀의 표정도, 그 붉은 표정에 잉크가 스미듯 물들던 내 마음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멋스러운 사내의 30여년 전의 군대 얘기가 끝없이 이어지면.... -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시간에 엔딩자막이 올나가 듯... 그리고 극장에 불이 켜지 듯,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또, 그 허망한 결말을 위한 꿈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