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페이지의 입출고 기록을 남기고 통장의 마지막 줄에는 42만2천6백8십원이란 숫자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내 무식한 씀씀이 - 있으면 몽땅 쓴다 라는 아주 원초적 마인드(순수하다 -.,-) - 를 스스로 견재하기 위해서 월급이 입금되는 다음 날 가족 중 한 명이 내가 접근 불가능한 계좌로 수동이체토록 시스템화 한 탓이다. 사십만원 정도만을 남기고 몽땅.
짧은 삼박사일의 귀국일정동안 쓸 수 있는 금액으로 충분치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액수라고 생각했다. 잘 수 있는 집이 있고 한끼 식사를 해결해 줄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아직 유효하니 말이다.
친구들의 알량한 호의를 무시하더라도 하루에 십만원씩의 지출은 절대 적은 액수가 아니다. 특히 어려웠던 내 이십대 초반을 오버랩시킨다면 이건 기적적인 성과에 가깝지 않은가. - 그 시절 전국여행으로 한달반동안 지출한 금액이 사십만원이었다. 텐트등을 준비하는 초기비용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귀국하면서 공항에서 열어 본 지갑에 십만원 정도가 들어있었으니까, +100,000원으로 생활은 보다 더 훨씬 매우 비약적으로 월등히 윤택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었다. 해서, 같이 해외근무 중인 dogy군의 부탁을 선뜻 받아 들여 ipop 나노를 구입할 겸 용산에 들른다. 온라인 최저가에는 만원정도 비싸지만 발품을 판 수고가 있으니 그냥 구입하기로하고 은행에 들러서 현금을 인출한다. 친구들의 '안면몰수 변수'를 대비해서 비상금 몇 만원을 더 인출할 겸, 삼십만원이란 숫자를 CD기의 버튼을 꼭꼭 눌러 입력한다.
손 벌리고 기다리던 파란 지폐 30장은 감감 무소식이고 하얀색 종이 쪼가리만이 약올리고 달아나던 초딩 짝꿍의 혀마냥 낼롬 밀려 나온다. 거기에 아주 친절하게 <잔고 부족>이라는 충고가 적혀있다. 그 사이 예금은 21만원으로 줄어있었다. 매달 25일에 빠져나가는 공과금이 이전달 25일이 토요일이었던 탓에 늦게 인출된 거다.
순식간에 50% 감봉으로 출발하더니 일은 점점 더 꼬인다. 친구들과 당구치고 4만원 탕진, 몸살로 누워 계시다는 아버지 약값지출(일요일이어서 문 연 약국을 찾으려고 택시비 오버),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을 위해서 - 여동생의 닥달 - 치킨 패밀리셑 두개(먹성좋은 집안같으니라고), 마지막날 친구들과 보드게임으로 7만원 털림.
돌아보니 아주 대책없는 인생처럼 느껴진다. 그 형편에 보드게임에 내기당구라니...-.,-;;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다. 돌아가는 비행편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추가금 15만원을 준비해야 할 형편이었고, 해외에 있는 동료들의 관례상 - 귀국자는 라면 두 박스에 소주 1.5리터 세 병, 담배 두 보루 - 사가야 할 물품도 있지않은가. 그렇지만 이미 남은 액수는 통장의 몇 천원과 지갑의 삼천원 뿐.
하하하...하아~~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 구나. 공항리무진을 기다리며 남은 돈 삼천원을 털어 디스 한 갑과 라이타 하나를 산다. 담배 연기는 어렵던 스무살 시절, 허기를 잊으려 사먹던 초콜릿 바 '자유시간'처럼 달콤하지만 씁쓸하다.
다행히 항공사 직원한테 사정사정해서 추가금 없이 비즈니스석에 얹혀 올 수 있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내식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죽으란 법 없다. 다 살아갈 구멍이 있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