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집이 목장을 하던 시절('우리집'이라고는 하지만 식구들은 서울에있고 아버지 혼자 산골에...), 한 달 가량을 그곳 강원도 산간 끝자락에서 보냈던 적이 있다. 일손도 도울겸해서 갔었던 거니까, 군 제대 후 아니면 대학 방학쯤이었던 것 같다.
자동차 바퀴자국만 양갈래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오르면 그 길의 끝단에 덩그러니 우사가 놓여 있는 꾀나 넓직한 젖소 목장이었고,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어서 근처엔 감자농사를 짓는 몇 가구의 집과 염소목장이 있을 뿐인 그런 곳이었다. 지금처럼 비가 많이 오게되면 길이 사라져서 우유를 배달하는 차- 가공유를 만들기 위해 짜놓은 젖을 운반하는 탱크로리 - 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덕분에 포크레인을 끌고가서 길을 만들어야했던 깡시골이었다.
외부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반공교육으로 받았던 '산에서 내려오는 낚시 복장의 수상한 자' 정도로 여겨질 법한 사람 왕래없는 곳이어서 주변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살가운 정이 오가던 곳이었는데, 언젠가 해질녘 산 아래쪽의 염소목장 아저씨께서 초대를 했더랬다.
아주머니께서 두부를 만드신다며 맛을 보라고 초대를 한 것이었는데, 산골마을의 특성상 이야기할 상대가 적었던 탓에 기꺼이 무료한 저녁시간을 죽일 요량으로 아버지와 서둘러 저녁 착유를 끝내고 마실을 갔었드랬다. 두부도 두부지만 말이나 섞자는 목적이 컸다.
낮은 백열전등 아래에 몇 안되는 가구의 식구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주머니께서 방금 만든 김이 모락모락한 두부를 내어 놓으셨다. 반듯한 틀에 가공하지 않은 덕분에 육면체라고 말하기 뭐한 볼품없도록 큼직하게 잘린 두부가 오래된 대접에 서너모 정도 담겨져 있었다. 그래도 그 모양과는 상관없이 백열전등의 노오란 빛에 솔솔 피어오르는 김이 먹음직 스러워 보였다.
그 모양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슷한 크기의 바가지에 너댓모 정도의 두부를 또 들여오시더라. 그리고 또 한 그릇, 또 한 그릇...
그리곤 또, 또, 또...
그 큰 그릇이 한 사람에 하나, 일인분이었던 거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놀란 눈을 뜨고 바라바고만 있었다. 힐끗 눈을 돌려 바라보니 아버지도 같은 시선으로 묵묵히 두부만 내려다 보고 계시더라.
시골출신인 아버지나 나나 어릴적 엄청난 싸이즈의 밥공기를 상대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부를 그렇게나 많이 받아보게 되리라곤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 고향의 두부란 한 두어 모 놓고 둘러앉아 김치싸서 막걸리 마시던 기억이 전부였으니까.
초대를 받았으니 싹싹 비워야하긴 하겠는데, 이거 참 난감한 순간이다.
그런데, 그 두렵던 첫 술을 뜨고 나니 그 근심이 싹 가실만큼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지금 이걸 적으면서도 그때의 그 맛이 떠올라 침이 고이는 것 같다. 그 많은 양이 절대 많은 양이 아니더라. 묵은 김치 몇 조각과 간장이 전부였지만 그 어떤 요리보다 훌륭한 맛이었다. 좀 갖잖은 얘기로 아부지나 나나 전라도 손맛에 길들여져서 입이 쫌 까탈스러운 편이었지만, 순식간에 그 많은 두부는 사라지고 없더라.
강원도가 물난리로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이놈의 떠그럴 비가 또 다시 내리니 걱정스러울 그 산골 이웃들과 그때의 두부가 생각난다. 비 때문에 이곳저곳 찢기고 어그러져서 볼품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좀 근사해 보이지는 않아도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 그곳에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zapzap, 강원도 가족여행간다는데, 그곳 사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즐거운 여행이 되시게나...
자동차 바퀴자국만 양갈래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오르면 그 길의 끝단에 덩그러니 우사가 놓여 있는 꾀나 넓직한 젖소 목장이었고,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어서 근처엔 감자농사를 짓는 몇 가구의 집과 염소목장이 있을 뿐인 그런 곳이었다. 지금처럼 비가 많이 오게되면 길이 사라져서 우유를 배달하는 차- 가공유를 만들기 위해 짜놓은 젖을 운반하는 탱크로리 - 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덕분에 포크레인을 끌고가서 길을 만들어야했던 깡시골이었다.
외부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반공교육으로 받았던 '산에서 내려오는 낚시 복장의 수상한 자' 정도로 여겨질 법한 사람 왕래없는 곳이어서 주변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살가운 정이 오가던 곳이었는데, 언젠가 해질녘 산 아래쪽의 염소목장 아저씨께서 초대를 했더랬다.
아주머니께서 두부를 만드신다며 맛을 보라고 초대를 한 것이었는데, 산골마을의 특성상 이야기할 상대가 적었던 탓에 기꺼이 무료한 저녁시간을 죽일 요량으로 아버지와 서둘러 저녁 착유를 끝내고 마실을 갔었드랬다. 두부도 두부지만 말이나 섞자는 목적이 컸다.
낮은 백열전등 아래에 몇 안되는 가구의 식구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주머니께서 방금 만든 김이 모락모락한 두부를 내어 놓으셨다. 반듯한 틀에 가공하지 않은 덕분에 육면체라고 말하기 뭐한 볼품없도록 큼직하게 잘린 두부가 오래된 대접에 서너모 정도 담겨져 있었다. 그래도 그 모양과는 상관없이 백열전등의 노오란 빛에 솔솔 피어오르는 김이 먹음직 스러워 보였다.
그 모양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슷한 크기의 바가지에 너댓모 정도의 두부를 또 들여오시더라. 그리고 또 한 그릇, 또 한 그릇...
그리곤 또, 또, 또...
그 큰 그릇이 한 사람에 하나, 일인분이었던 거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놀란 눈을 뜨고 바라바고만 있었다. 힐끗 눈을 돌려 바라보니 아버지도 같은 시선으로 묵묵히 두부만 내려다 보고 계시더라.
시골출신인 아버지나 나나 어릴적 엄청난 싸이즈의 밥공기를 상대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부를 그렇게나 많이 받아보게 되리라곤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 고향의 두부란 한 두어 모 놓고 둘러앉아 김치싸서 막걸리 마시던 기억이 전부였으니까.
초대를 받았으니 싹싹 비워야하긴 하겠는데, 이거 참 난감한 순간이다.
그런데, 그 두렵던 첫 술을 뜨고 나니 그 근심이 싹 가실만큼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지금 이걸 적으면서도 그때의 그 맛이 떠올라 침이 고이는 것 같다. 그 많은 양이 절대 많은 양이 아니더라. 묵은 김치 몇 조각과 간장이 전부였지만 그 어떤 요리보다 훌륭한 맛이었다. 좀 갖잖은 얘기로 아부지나 나나 전라도 손맛에 길들여져서 입이 쫌 까탈스러운 편이었지만, 순식간에 그 많은 두부는 사라지고 없더라.
강원도가 물난리로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이놈의 떠그럴 비가 또 다시 내리니 걱정스러울 그 산골 이웃들과 그때의 두부가 생각난다. 비 때문에 이곳저곳 찢기고 어그러져서 볼품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좀 근사해 보이지는 않아도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 그곳에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zapzap, 강원도 가족여행간다는데, 그곳 사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즐거운 여행이 되시게나...
더이상의 밤마실은 없다며 단호한 표정으로 사라졌던 그는 과연...?